자녀교육 [사랑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무주상보시 : 순수한 사랑 / 유주상보시 : 계산적인 사랑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말,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진부하고 식상한 말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정말 풍부하게 가진 사람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주는 것을 인정받고자 하지도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것이 그것이다.
상(相)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 즉 준다는 마음조차 없이 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도록 하라.'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무주상보시의 반대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이다.
준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주는 것은 상대적으로 저급한 보시이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라고 표현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주는 것을 의식하며 주는 경우에는 주고 나서 생색을 내는 행위도 따라온다.
애초에 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 줄 마음도 없으면서
억지로 인정받기 위해 주기 때문에 생색을 내게 되는 것이다.
물질을 주든 마음을 주든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물질을 주고 생색을 내는 것은 유치하지만 귀엽게 볼 수도 있다.
마음을 주고 생색을 내는 것은 그보다 좀더 유치하고 불쌍해 보인다.
정신이 빈곤하다는 것은 물질이 빈곤한 것보다 훨씬 불쌍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만큼 해 주었는데 너는 왜 나에게 이것밖에 못하냐?'
'내가 이 만큼이나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하하핫(과시의 웃음). 넌 거절하면 안 돼. 고맙게 알라고.'
이런 태도는 짝짓기철에 수컷 새들이 몸을 부풀리고 깍깍거리는 것처럼 우습다.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것은 유주상보시이며 순수하지 못한 마음이다.
무주상보시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유주상보시를 하는 사람이 더욱 많아 보인다.
(어쩌면 내 눈에 보인 세상이 그런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결혼에는 사랑보다 조건이 우선시되고 결혼 후에도 give and take의 관계가 유지된다.
무주상보시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만나서 사는 과정에는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살 때에는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양보를 할 때에도 계산을 해 가면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유주상보시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으며
적어도 준 만큼은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는데, 세상 일은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
때로는 주고도 못 받는 일도 많고, 잘 하고도 욕 먹는 일도 많다.
정확하게 주고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인간관계 및 결혼에서 시행착오가 많다.
"제가 포기해야 하나요?"
"제가 자존심을 버려야 하나요?"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대답은 이렇다.
"원래 사랑이란 돌려받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사랑이란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 : 순수한 이상(理想)
사람들 사이의 사랑 외에 개인의 이상, 소망과 관련해서도 무주상보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래 전에 이런 글을 읽었다.
<자기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이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것, 현세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생각도 욕심이며 순수한 마음이 아니다.
라디오에서 '비석과 우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막 횡단을 한 두 프랑스 청년이 자신들의 모험을 기념하고자 했다.
한 사람은 자기 이름을 넣어 기념비를 만들었고, 한 사람은 우물을 팠다.
오랜 시간이 후 비석은 모래바람에 닳아버리고 잊혀졌지만
우물은 여전히 남아서 여행자들의 목을 축여 주고 있다.>
'무주상보시'는 자신의 인생의 이상을 설정할 적에 염두에 둘 중요한 사항이다.
자연스럽고 가식적이지 않으며 순수하게 마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 자신이 좋아하는(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서
- 직업을 갖고 생활을 하기 위해 (자기 앞가림)
- 자신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서 (이타심)
이런 소망은 순수한 편에 속한다.
- 남들에게 멋지게 보이는 일이라서 하고 싶다. (과시욕)
-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이름을 남기고 싶다. (명예욕)
- 많은 권력 또는 부를 갖고 싶다. (권력욕, 야욕, 탐욕)
- 유명인 또는 권력자가 되어서 많은 이성을 취하고 싶다. (색욕)
이런 소망은 과시욕, 허영심, 탐심에서 나온 것으로 순수하지 않다.
'무주상보시에 의한 이상 설정'의 경우 도중에 난관에 부딪치고 실패하더라도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지는 않는다.
자신이 순수한 마음으로 뜻을 세웠다면 그것이 달성되지 못하였음에 속상함은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실패했더라도 진정한 실패가 아니다. 순수한 뜻은 여전히 가치있다.
'유주상보시에 의한 이상 설정'의 경우 실패했을 때 고통이 크다.
이미 이상 설정이 진심(眞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인을 의식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것이 무너졌을 때 상실감과 패배감이 큰 것이다.
자살하는 유명인(정치인, 재벌, 연예인 등)의 경우는 후자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은 적당한 야욕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들을 한다.
한때는 나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성공하느냐가 관건이다. 성공의 평가기준이 무엇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어도 실상은 추악한 인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권력이나 재물의 절대적인 소유치로써 성공 정도를 가늠할 수 없는 법이다.
정말 성공하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런 것 같다.
- 개인적인 행복의 수치 (나 자신이 행복한가?)
- 가까운 사람의 행복의 수치 (가족 등 내 주변 사람이 행복한가?)
- 내가 타인에게 기여한 행복의 수치 (사회기여도)
무주상보시 : 결혼과 자녀 양육의 본질
사랑이란 주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 유주상보시를 하던 사람의 마음에서는 의구심이 든다.
'받은 것도 없는데 계속 주면 뭐가 남지?'
'받지 못하고 주기만 하면 손해잖아.'
그러나 무주상보시를 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사랑이란 푸고 또 퍼올려도 퐁퐁퐁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물처럼 주어도 주어도 늘 남아 있으며
오히려 줌으로써 더 맑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미혼자 중에 결혼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하면 여자가(또는 남자가) 손해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요즘은 힘들게 자식을 키워도 노후를 보장받지 못하는데 뭐하러 자식을 낳아 키우나요?"
나도 예전에는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결혼과 자녀양육은 인간을 한층 성숙하게 해 주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기에 결혼한 사람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 손해보는 것이 맞다.
자식을 키워도 되돌려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부모가 손해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런 숫자 계산과 무관한 행복이 있다.
계산한 수치가 마이너스라고 한다면, 그 마이너스의 반대로 다시 마이너스를 곱해서 플러스가 되고
제곱 또는 세제곱으로 늘어나는 행복이다.
또는 현실적으로 없는 내용같아도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허수 i와 같은 행복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교회에 다녔고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지만 정확한 의미는 어른이 되어서 깨닫고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장 24-25절)
희생이란 고통이 아니라 보람이고 행복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글이다.
고생하고 지쳐서 땅에 떨어져 썩은 홀쭉한 밀알 껍질처럼 되어버린 수많은 세상의 부모들,
이들은 또 다른 밀알을 만들어낸 보람에 자신을 잊는다.
산란 후에 죽어가는 수많은 연어들과 오징어들도 마찬가지이다.
후세를 만들고 이름없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유주상보시를 하는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목적은 다양할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이 결혼의 심층적인 내용보다는 말단적, 외부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편이다.
- 결혼은 합법적으로 성욕을 해소하는 수단이다. (안정적으로 성행위를 하기 위해 결혼한다.)
- 결혼은 가장 뿌리깊은 매춘이다. (남자의 경제능력과 여자의 성을 교환하는 것이다.)
- 자신의 소유물을 잃지 않고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결혼을 한다.
- 보다 편리한 생활을 위해 결혼한다.
(여자: 일하기 싫어서 결혼한다. 남자 : 살림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한다.)
-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결혼한다. 기타등등
결혼이란 성행위를 위한 것도 아니고 돈을 벌어다줄 남자가 필요해서 또는 밥해줄 여자가 필요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 결혼에 딸려 오는 부수적인 내용이지 본질이 아니다.
성행위를 하지 않고 사는 부부, 여자가 돈벌고 남자를 부양하는 부부, 가정부를 두고 사는 부부도 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희생에도 이유가 없다. 애초에 목적이 없다.
이유라고 한다면 단 두 글자다. '그냥'
무주상보시 : 자연(自然)의 이치
무주상보시는 자연스러운 에너지의 흐름이다.
춘하추동 사계가 돌아가듯이 자연스럽게 때에 맞춰 사는 법이다.
자연스러운 마음은 순수한 마음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마음을 막고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하는 순간 불행은 시작된다.
욕심과 탐심과 계산하는 마음은 부자연스러운 마음이며 불순한 마음이다.
자기 마음 속에서 자연스러운 무주상보시의 마음을 발견하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삶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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